감 귤,눈사람 이야기.24

새로 들인 벽장식 대형 냉장고 과일통에

 

둘째가 제주에서 사온 꼬마 감귤이랑

 

큰애기 젖가슴처럼 봉곳한 대봉감이랑

 

목요일 오전에만 20프로 세일의 멜런 한 수를 넣었어요

 

 

천연색 산수화 여백에

 

황진이의 시조가 세로로 쓰여져 있던

 

자랄 적 벽장의 네 짝 문들

 

그 앞 보료에 놋화로 안고 좌정하신 할머니..

 

 

콩엿이랑 검은 깨 인절미랑

 

곶감이랑 아주 두툼한 책들이랑

 

벽장에서 딩굴다가 한 입만 맛보고

 

또 맛보다가 인쥐 되던 추억들...


~~~~~~~~~~~~~

이오의 불편한 걸음을 부축하며 뒤에서 나타나는 건 의외로 나옥이었다.

 

눈길에 한바탕 미끄러졌었던지 두 여자의 옷에는 눈이 군데군데 묻어 있다.

 

"정말 오긴 오네."

"미안해요,전 진씨."

"거짓말 한 건 아니었어."

"우체국을 가려다가 그만 이 언니를 만나서.."

"혼자서 일어나긴 힘들 것같아서 조금 거든 거야. 그러느라 시간은 걸렸지만.."

"우체국 거의 다 가서...그 공터에서요."

 

네 사람은 한 동안 정신 없이 서로의 말을 교차시킨다.

 

눈을 털고 수건으로 머리와 이마를 닦은 후에야 나옥과 이오는 안으로 올라선다.

 

진분홍 코트 위에 새하얀 모피 목도리를 길게 두른 나옥의 오늘 의상 컨셉은 무척 순수해보인다.

 

그런가 하면 이오는 만약의 낙상에 대한 방비책인지 누비질 된 반코트와 바지를 입고 있다.

 

은이는 유자차를 한 잔 더 만들어서 탁자에 다과를 올린다.

 

"무슨 중대사로 이런 날에 외출을..?"

 

나옥과 전 진이 잠시 시선을 나누는 것이 왠지 기분에 거슬려 은이는 이오만을 바라본다.

 

"악보를 갖고 싶다는 인터넷 이웃한테 부쳐주느라.."

"직접 와서 받아가라지."

"남해안 섬에 사는 남자인데 나보다 더 장애가 높아요."

 

은이는 약간 감동해서 탄성을 올린다. 조금이라도 일찍 부쳐주려고 이오가 무리한 나들이를 감행했을 것이다.

 

재활의학만 선택하려는 동기 남학생이 기억 난다. 장애란 정말 얼마나 불편한가.

 

"너는 공부만 해.우리끼리 놀고 있을 테니.."

 

나옥이 은이의 눈치를 보다가 밀어붙이듯 말해버린다. 전 진은 이오를 일으켜보고 있다.

 

둔부에 멍이라도 들었을까 봐 배려하는 눈치다. 하기야 이오의 가냘픈 몸은 겉보기에 아슬아슬하다.

 

"좀 쉬어요. 우리도 그냥 같이 음악이나 듣고 티브이나 보고.."

"마침 이 분이 여기로 오는 길이라 정말 다행이었어요."

"사람이 살다가 아주 죽으란 법은 없는 셈이죠. 앞으로 우리 친하게 지내요."

"아버지한테서 댁의 이야긴 잘 듣고 있어요. 아버지가 전에는 아버님하고 동네 등산 모임 회원이었대요."

"그렇죠. 아주 너무나 액티브한 분이었으니까요."

 

전 진은 한숨을 푹 내쉰다. 마치 죽은 것처럼 쇠약해진 현재의 부친이 눈 앞에 떠오른다.

 

"이런 날은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해야 하는데.."

"강아지 천성이신가 보네. 하기야 강아지도 원래는 발바닥이 차가운 게 싫어 그렇게 깡충거린다지만.."

"눈이 오면 난 없던 기운도 나요."

"그러면 우리 둘만 마당에서 놀아볼래요?"

 

이오가 소퍼에 비스듬히 눕는 걸 보고나서 전 진은 나옥을 데리고 밖으로 나간다.

 

생각보다 긴 시간 동안 두 남녀는 즐거운 소리를 지르며 눈장난을 친다. 저러다 진짜로 정 들겠네.

 

"은이야,저 사람들 언제부터 저렇게 연인이야? 러브 스토리 영화의 한 장면같다."

"전선배는 눈 싫어해. 그냥 대접삼아 저러는 거지."

"어머나,제법 사람같은 눈사람이다,저 거.."

 

누운 이오가 환성을 지르기에 내다보니 유리창 바로 밖에 키 큰 눈사람이 만들어지는 중이다.

 

"웃긴다,어린애도 하나 만들어 붙이네."

"아무튼 나옥은 오버라니까..감기들이나 걸려보라지."

"어머,그러지 마. 저러다 결혼할 지도 모르는데.."

 

이오가 사심 없이 즐거워보여 은이도 그냥 좋아해주기로 작심한다.

 

이오가 두 팔을 들 적마다 아직도 다 여물지 않은 팔목의 상처가 보이기때문이다.

 

이러다가 정녕 아가타 크리스티의 쥐덫에서처럼 눈으로 둘러쳐진 밀실이 생겨나면 어떡하나.

 

아 참 집에 스키가 있지. 스노 보드도 있으니 대충 안심이네. 그러나 갈수록 전 진이 밉다.

 

나옥같은 여자애 마음에도 없으면서 오래 상대해주는 수컷으로서의 전 진 말이다.

 

간절히 기다려지는 부모는 오늘따라 통 돌아올 기척이 안 보인다. 나옥이 이오같았으면 안심 될 텐데...

 


by jemmagalgani | 2009/11/20 16:52 | 트랙백 | 덧글(0)

표 현,눈사람 이야기.23

살짝 변비에 걸린 아기는

 

작은 이마에 진땀을

 

뽀작뽀작 흘려가며

 

대사를 겨우 치러내고..

 

 

아기 대신 아프게 해달라고 빈

 

기도가 상달되어 엇갈려

 

몸살에 걸린 아기엄마는

 

회복기로 접어든 돌 전 아기는...

 

 

사브작 나브작 두 팔을 옮기며

 

아주 정숙하게 일하고 장난 치고

 

마술처럼 그래도 집안 일들은

 

오브작 하브작 진행돼 가고...

 

~~~~~~~~~~~~~

왠일로 눈이 펑펑 오지게 내린다. 은이는 기분 좋게 시험공부를 한다.

 

의대라는 게 만날 고3 찜쪄 먹을 고행의 공부를 해야 하지만 길이 잘 든 은이에게는 힘들지 않다.

 

무슨 짓이든 다 몸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는 어느 수석 합격자의 수기에 은이는 전적으로 동감이다.

 

부친은 친구가 운영하는 기원으로 나가고 모친은 오늘도 발품을 팔며 보험 세일즈를 한다.

 

"네가 학굘 그만두든지...네 엄마 보험 좀 그만 시켜라."

 

엄마 쪽 친척이나 친구들에게서 은이는 1년에 한 두 차례 정도 이 소릴 듣는다.

 

그야 졸리려면 성가시겠지. 누구 집이라고 돈을 앞치마에 싸안고 있다 보험 들겠나.

 

생활 설계사니 인생 기획사니 말은 그럴 듯 하지만 중년의 지친 생활인들에게 설계고 기획이고의 여유가 흔할 것인가.

 

진짜로 큰 고객들에게는 팔팔한 젊은 남성들이 간다. 하지만 은이는 엄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런 날이면 공연히 애교라도 부리며 엄마의 종아리를 주물러줄 뿐이다.

 

속세의 재물이 눈이나 비처럼 골고루 내려주면 그 얼마나 좋으랴. 돈은 대체로 러키나 스시같은 인간들에게

 

퍼부어지며 조만간 그들은 홍수나 산사태로 유명을 달리 할 것이다.

 

갑자기 찬 바람이 들이친다 생각했더니 무슨 마술같이 전 진이 마루로 들어서며 웃는다.

 

어디서 구했는지 옛날 하고도 고리짝의 검은 물 들인 군복을 걸치고 있다.

 

게다가 허연 고무신 한 켤레가 현관 바닥에 처억 놓여져 있다. 박물관에서 뛰쳐나온 것같은 차림새다.

 

"무슨 일이에요? 전화라도 하고 와야지.."

"나는 죄 없어. 은이친구 나옥이가 여기서 만나자고 하더라."

"뭐라고? 자기들 맘대로 내 집이 무슨 아지트야?"

"시험문제 족보 가르쳐줄 테니 너도 손해날 건 없지."

"그렇게 공부하면 나중에 낭패 본다더라.."

"그래도 일단은 학점이 준수해야지. 눈 한 번 참 신나게 오네."

"나옥이랑 만나려면 팔짱 끼고 남산에라도 가. 나한테 민폐 끼치지 말고."

"자기 집 근처 도산공원으로 나오라는 걸 내가 여기로 지정했다."

 

충분히 털지 않은 옷의 눈들이 마루바닥에 물웅덩이를 만든다. 은이는 대걸레로 스윽슥 문질러낸다.

 

아닌 게 아니라 밤샘으로 두 눈도 아프고 해서 잠시 쉬려고 작정하며 유자차를 세 잔 만들어놓는다.

 

하지만 온다던 나옥이는 오지 않고 시간만 흐른다. 나옥이는 절대로 늦을 여자가 아닌데..

 

"선배가 나 속인 거지? 자꾸 이러면 학교 게시판에 대자보 붙인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지. 그래봤자 여자가 손해지."

 

정말 속이 상해서 파르르 돌아서는데 전 진의 얼굴이 은이의 볼에 부닺혀버린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전 진의 거친 품 속으로 은이의 부피 적은 몸이 흡수돼버린다. 꿈에도 상상 못 한 사건이다.

 

남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신사와 야수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더니 그 말이 맞는가 보다.

 

게다가 이제 보니 전 진의 입에서는 약간의 술냄새가 맴돌고 있다.

 

전 진은 무슨 힘으로 은이를 번쩍 안아 들고 소퍼로 가서 앉는다. 마드 서의 휴대폰 번호를 알아두는 건데 그랬다.


"이런 거 몇 번 하면 함락돼버리는 여자가 아니라고..고소할 수도 있어."

"네가 나 좀 붙잡아서 키워줘라. 평강공주가 돼달란 말이야."

"스스로 온달이려고 하지 마. 선배도 당당한 사냥꾼이 되어보라고.."

 

거칠게 반항하며 은이는 전 진의 완력에서 해방된다. 전 진은 바보처럼 멍하니 은이를 바라본다.

 

"함박눈이 쏟아지면 나는 너무나 추워. 심장에 동상이 생기는 것같다고.."

"팔자 좋은 소리만 골라 하네. 눈이 대리시험 봐주는 것도 아니고.."

 

구세주가 와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열릴 듯 말 듯 문이 밀리며 아랫집의 이오가

 

창백한 낯을 들이민다. 이오는 전 진에게도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by jemmagalgani | 2009/11/19 16:16 | 트랙백 | 덧글(0)

빨래,눈사람 이야기.22

겹겹이 얼어 붙은 시냇가에서

 

방망이질로 옷을 빨았던

 

머잖은 과거의 우리 어머니들

 

그래도 다용도실 세탁기가 아주 멀다

 

 

고무 장갑도 없고

 

잘 풀리는 세제들도 없이

 

정말 무슨 죽을 힘으로

 

겨울 빨래를 해냈을까

 

 

호된 시집살이도 졸업한 지금

 

몸에 힘든 일은 죽어도 못 해

 

난로에 장판에 첩첩이 틀면서

 

환기도 안 한 두통에 시달리다니...



~~~~~~~~~~~~`

부친의 사망에 대해서는 전 진도 매일 생각하고 있다.

 

마드 서가 부친이 위독하다고 말했을 적부터 전 진의 심장은 사뭇 벌렁거리고 있다.

 

전 진이 2세라면 아버지는 1세다. 그 1세가 자신의 한살이를 마치고 이승을 떠나는 것이다.

 

차라리 부친이 죽어버린다면 좀 더 세상 사는 게 간단해지지 않을까 하는 공상도 해보았다.

 

부친을 장사 지낸 직후부터 러키,스시와의 관계를 말끔히 정리해버리는 것이다.

 

재산을 나누어준다면 반갑겠지만 전 진은 러키와 스시에게서 바라는 것도 별로 없다.

 

멀리 남미의 한 노부인이 전 진에게 알몸만 와도 부자로 살게 해준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노부인이 엄청난 부자인 것은 첫 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전 진같이 달랑 한 몸이다.

 

"잠깐 여기서 멈추어요."

 

부친의 병실로 향하려는 전 진의 발길을 마드 서가 정지시킨다. 집안은 조용히 비어 있다.

 

"위독하시다면서요? 아니에요?"

"아직은 아니에요. 실은 거짓말이에요."

"왜요? 왜 이런 거짓말을 하지요?"

"집에 오게 하려구요. 그리고 그 여자애 너무 믿지 말아요."

"위독하시지 않아도 한 번쯤 보고 싶어요. 오늘이라도 어디론가 가버릴 지 모르니.."

"안 되요. 그보다도 이층방에나 올라가지요."

 

평시에는 그런 대로 우아해보이는 마드 서가 갑자기 기운을 쓰며 전 진을 이층으로 밀어올린다.

 

그러자 문득 전 진의 뇌리에 어제 밤 내내 불이 켜져 있던 자신의 방이 떠오른다.

 

"어제 누군가 나를 찾아서 왔던가요?"

"절대로 아니죠. 하지만 이 집 어디선가...당신을 기다리는 사람은 있을 지도 모르죠."

"천만에요. 하은장은 나의 무덤이에요."

전 진은 썩은 냉소를 날려보지만 몸은 이미 자신의 방문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왜 이 방문은 만날 하루종일 열려 있는 거지요?"

"사용하는 사람이 없으니 남들에겐 해방구일 수도 있는 거죠."

"그러지 말라고 나물댁한테 말해두어요. 나도 사람이라 화가 난다구요."

"나물댁이 요샌 미세스 민이라구요. 그리고 부친,부친하시지만 부친 아랫도리 한 번 씻겨주셨나요?"

"그 건 당신 일이에요."

"가끔 그 하체를 보며 내가 당신...바지 속을 상상해봐요. 러키보다는 바로 당신의.."

 

순간 전 진의 숨이 확 막혀버린다. 마드 서가 돌연 무서워진다. 여자는 본질적으로 수컷을 사마귀처럼 잡아 먹는가.

 

가슴으로 안겨들려는 마드 서를 밀치며 전 진은 자기 공간으로 들어가 방문을 잠가버린다.

 

부친과 전 진은 서로 생소하다. 친자로 인정은 받았지만 역시 너무나 멀다. 이제부턴 마드 서도 경계해야지.

 

여자들이란 다 그렇고 그런 늪이 아닌가. 번식의 행위 따위는 질리도록 보았다.

 

포르노 필름이 아니라 해부 도면으로도 말이다. 부친과 엄마에겐 사랑의 보프라기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욕정마저도...지독히 선명한 의미의 취중 도킹이었을 뿐이다.

 

by jemmagalgani | 2009/11/18 16:32 | 트랙백 | 덧글(0)

기 온,눈사람 이야기.21

여름 동안 추욱 늘어진 심신을

 

대기의 냉장고에 넣어

 

바짝 얼려서 신선도를 유지케 하려고

 

오늘은 새벽부터 영하 5도

 

 

석 달 동안 만판 설치던

 

아파트 벌레들 제거하려고

 

역시 오늘은 아침부터

 

일제 소탕 소독 작전

 

 

열흘 붉은 꽃 없고

 

권불 10년이라던가

 

정기적인 혼쭐 속에서

 

인간과 짐승은 단련되는가


~~~~~~~~~~~``


은이엄마는 어느 새 안성까지 도착했다는 전화다. 서울은 이제 잠깐이다.

 

다시 마트에 가는 체하고 은이는 또 전 진의 집으로 간다. 다행히 러키는 없다.

 

조금 서서 기다리다가 다리가 아파 주저앉으려는데 대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느릿하게 나온다.

 

올리브색 털목도리를 전신에 칭칭 감은 여자다. 멀리 가는 차림은 아니고 그저 동네 마실 가려는 눈치다.

 

불규칙한 생리가 아침에 터져 생리대를 사러 나온 마드 서다. 그녀의 환자는 잠시 잠들었다.

 

"저어,부탁이 있는데요.."

"누구신데요? 나는 누구 부탁 들어줄 만한 여유가 없는데.."

"다름 아니고 이 댁 차남 전 진을.."

"누구라구요? 전 진이 왜 당신하고?"

"지금 우리 집에 있는데 제발 좀 데려가주세요."

 

은이가 손이라도 빌 듯이 달라 붙자 마드 서가 멍청히 바라본다.

 

"당신은 도련님이 성가셔요?"

"미안하지만 나나 되니까 선배를 이만큼 견뎌주고 있는 거에요."

"그런가요? 그런데 당신 집이 어디죠?"

"실은..바로 저 집인데요."

 

그제서야 마드 서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다. 은이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같다.

 

"무슨 관계인가요? 그 걸 모르면 부탁 못 들어줘요."

"그냥 선후배 관계에요. 그리고 지금은 왠지 주인과 식객 사이구요."

"외국에 안 나갔으면 다행이에요. 좋아요,내가 찾아갈 게요."

 

마드 서가 선선히 수락하는 바람에 은이는 안심하고 집으로 들어온다. 전 진은 욕실에 들어 있다.

 

그녀가 마트엘 다녀오려면 시간은 좀 걸리겠지. 그러나 오늘은 얼른 전 진에게서 해방되어야 한다.

 

엄마한테 전 진과 같이 있는 걸 들키면 고단수의 심문을 넘어 취조 꽤나 당할 것이다.

 

왜 세상의 엄마들은 자기 딸의 결백을 못 믿는 것인가. 눈빛만 마주치고 있어도 당장 온갖 코스를 완주한 줄로 착각한다.

 

아니야,지금은 아니고 말고. 전 진이 제 정신 차리고 복학한 다음에야 아주 쬐끔 생각해줄 모양인데...

 

그러나저러나 이 마드 서라는 여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산전수전공중전 우주전 다 겪어치운 늙다리같기도 하고 그와는 반대로 천지분간

 

못 하는 몽상파같기도 하다. 다만 한 가지 얼굴 윤곽만은 은이의 심미안에도 든다. 흡사 모딜리아니의 여인같이 길죽하고 갸름한 윤곽이

 

다. 어쩐지 파리쟌느스러운...프랑스어로 길을 물어보면 얼른 정확한 대답이 돌아올 것만 같은 분위기..

 

하기야 은이도 누군가에게서는 프랑스의 여자 레지스탕스같다는 비평을 들은 적이 있다.

 

"어딜 들락날락 하는 거야? 불안해서 볼 일도 제대로 못 보겠고.."

"그 냄새 치우고나 그런 말 해요. 속 안 좋아요?"

"글쎄,달걀 부패하는 악취가 나지?"

"알면 됐구요. 어서 환풍기 틀라구요."

"사람 뱃속은 다 들여다 봤으면서 뭘 그리 질겁이셔."

 

무안스러워하면서 전 진은 주눅이 잔뜩 들어 어정거리며 나온다. 그 참에 대문 벨이 울린다. 그녀일 것이다.

 

급히 문을 열자 과연 마드 서가 제법 당당하게 들이닥친다.

 

"아버님이 위독해요. 얼른 오셔야겠어요."

 

추위 덕인지 양 볼이 붉어서 더욱 실감이 난다. 전 진은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있다.

 

"그런데 나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어요?"

"방금 나물댁이 이 집 딸이랑 잡담했다고 그래서.."

 

아무튼 그렇게 전 진은 마드 서와 같이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은이가 한숨을 내리쉬자마자 득달같이

 

부모님이 바퀴 트렁크를 질질 끌며 돌아온다. 마드 서는 적어도 동네에 은이와 전 진의 스캔들 풍길 여자는 아니다.

by jemmagalgani | 2009/11/17 15:55 | 트랙백 | 덧글(0)

그 네.눈사람 이야기.20

그네가 꼭 나무여야 하는가

 

또는 꼭 벤치여야 하는가

 

아기의 그네는 따스한 살 그네

 

엄마의 두 다리로 만드는 그네다

 

 

비 아니면 흐림,그리고 또 우박

 

연일 우중충한 바깥이 두려워

 

초보 모녀가 마루에서

 

다정하게 태우고 타는 살 그네다

 

 

엄마는 누워서 다리를 흔들흔들

 

아기는 엄마 발등에 올라 앉아

 

아빠 어디쯤 오시나 봐라

 

고사리 손뼉 치며 콧물 뚝 떼도 뚝



~~~~~~~~~~~````

하은장에서는 전 진이 아주 먼 데로 가버린 줄 아는 것인가.

 

전 진의 휴대폰이 하도 안 울려 은이는 조금 걱정이 된다.

 

은이의 부모는 지금 상경하는 길의 어느 고속도로 휴게소란다.

 

그 전에 전 진을 보내버려야 하는데 정작 전 진 자신은 마냥 늘어져 있다.

 

자기 집처럼 들락거리며 머리도 감고 다리미 대를 가져다가 스윽슥 재킷을 다리기도 한다.

 

은이는 마트에 가다 말고 불쑥 전 진의 집으로 들어간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좌우지간

 

러키가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요즘의 끽연이란 누구에게서도 죽도록 야단

 

맞아야 하는 고질병이다. 러키는 그래도 이 하은장의 가주인데..담배만큼은 허락 못 받나 보다.

 

아무렴,타인을,그 것도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을 폐암으로 인도하는 악습인데...지탄 받아야 마땅하지.

 

은이를 보더니 러키는 상당히 놀란 기색이 된다. 그러나 곧 전날의 어린 계집애를 보는 얼굴로 돌아간다.

 

"왠일이야? 전 진이라면 비행기 타고 날아간 모양인데.."

"정말 그럴까요? 실은..."

"우리가 잘 아는 사이던가? 나는 사실 동네 사람들 잘 몰라."

"그건 저도 마찬가지에요. 잘 산다고 해봐야 우리 집에 별 도움 되는 일도 없구요."

"설마 전 진하고 사귈 생각이야?"

"전 진보다는 형님한테 관심이 생기는데요.."

"그래,여자들은 내가 재벌의 상속자라고 생각하지. 그러나 실속은 정말 꽝이야."

 

러키는 기분 잡쳤다는 듯이 피우던 담배를 버리고 발로 짓밟았다. 마치 은이같은 여자애들을 무시하는

 

듯이 아주 집요하고 정확하게 뭉갰다. 안에서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러키를 찾고 있다.

 

은이는 러키에게 들어가도 된다는 눈빛을 보내고 뒤돌아서 가는 러키의 약간 큼직한 엉덩이를 우스운 기분으로 바라다 본다.

 

그리 비만하지 않은 러키의 신체부분 중 가장 뚱뚱해보이는 둔부,마치 쿠션 좋은 방석처럼 말이다.

 

천천히 마트로 가면서 은이는 자문자답해본다. 왜 나는 갑자기 러키에게 흥미가 생겼을까.

 

얼굴도 기억나지 않던 며칠 전처럼 완벽한 타인이던 러키가 왜 아련한 추억이라도 나눈 사이같이 마음으로 기어드는 것일까.

 

살아가는 대책이라곤 없어보이는 전 진에 대한 반동일까. 러키가 가진 저택과 통장,그리고 사업체와 빌딩들...반면에 전 진은 얄퍅한 엉덩

 

이를 청바지 속에 감추고는 은이의 마루에서 돌아다니고 있다. 은이의 부모,은이의 아버지 이름으로 등기된 마루 말이다.

 

의대생이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졸업생이라야 하고 나아가서는 수입 좋은 개업의라야 하고...

 

섣불리 남자의 장래 가능성만을 믿어 쪽박 찬 선배들이 두엇 있다. 그야말로 헛똑똑이들이다.

 

은이는 집안 사정상 도저히 그런 만용은 못 부린다. 은이가 잘못 풀리면 필시 엄마는 부친에게서 이혼이라도 당할 것이다.

 

아버지는 야박하고 소심한 투자자이기때문이다. 그나마 엄마의 설득으로 지금까지 무남독녀인 은이에게 학비를 대주고 있다.

 

다른 부모들과 아이들이 듣기엔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스토리일 것이다. 세상에 은이만한 우등생이 어디 있다고...

 

그런 부친을 늘 달래고 떠받드느라 엄마는 남 모를 빚도 꽤 있는 모양이다. 여행은 맨손으로 갈 수 있는가.

 

마트에서 간단한 재료들을 사다가 은이는 전 진과 해물 스파게티를 해먹는다. 인스턴트 커피도 타서 먹인다.

 

결벽증이 있는 부친이 만날 말갛게 닦아놓는 통 유리창 너머로 가루눈이 조금 빈약하게 내린다.

 

 


by jemmagalgani | 2009/11/16 16:11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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