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 간,눈사람 이야기.73

지금 이 시각에도

 

어느 곳에선가 임종을 앞둔 젊은이

 

또는 망망대해에 빠져

 

점점 기운이 지쳐가는 어부들

 

 

디스커버리 채널의

 

그 모든 조난자들이라고 생각해

 

네가 바로 지극한 고통과

 

극복의 찬스에 있다고 말이야

 

 

드라마틱한 삶이란

 

즐거움과 비통으로 비벼져 있는 것

 

골이 깊듯 봉우리는 높고

 

지나고 나면 명작이 된다

 

~~~~~~~~~`

그 긴급 전화는 새벽 3시에 걸려왔다.

 

그런 시각에 소란을 피우는 전화치고 반가운 소식이란 드문 법이다.

 

남편은 처음에 무척이나 졸린 음성이었지만 잠시 후 불이라도 붙은 듯 급히 옷을 꿰어 입고 주차장으

 

로 내려갔다. 지옥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지옥은 정말 화가 났다. 그러나 지옥에게도 두 가지

 

방법은 있었다. 비교적 친숙한 사이인 남편의 친이모,노처녀로 늙은 그 시이모에게 물어보든가 한 아

 

파트의 남 우에게서 명이 외삼촌의 전화번호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시댁의 일이든 명이의 사고든 두

 

 사람은 이리저리 물어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젠 직장도 없어 경제력이 별로인 시이모는 은연중

 

 시댁 전체의 왕따를 받고 있다. 그래서인지 지옥에게조차 의지하려고 들었다.

 

"뭐라고? 나도 전혀 모르겠는데...직장 일이겠지,뭐."

 

낮과 밤을 거꾸로 사는 시이모는 혼자 케이블 드라마를 보고 있었던 듯 뭔가 입에서 우물거리며 나른

 

하게 대답한다. 그러나 직장에 전화를 걸어보거나 남 우에게 올라가기는 너무나 이른 시각이었다. 답

 

답해진 지옥은 동생인 나옥에게 별 기대도 않고 전화해보았는데 왠일인지 당장 나옥이 수화기를 집어

 

든다. 그러더니 자신이 직접 지옥에게 찾아오겠다고 했다. 중반에 접어든 임신부의 몸으로 한밤중에

 

자가용을 운전해 찾아오다니? 자신의 일,즉 명이 건에 골몰하느라 미처 챙기지 못 했던 나옥이다.

 

집에만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지옥은 휴대폰을 손에 들고 아파트 현관으로 나가본다.

 

그런데 약 30분 후 다시 나옥의 울부짖는 듯 한 전화가 걸려왔다. 자신이 차를 몰고 오다가 조금은 외

 

진 찻길에서 그만 길고양이 한 마리를 치어버렸다는 것이다. 하필이면 왜 고양이일까. 그 지점이라면

 

지옥도 좀 으스스해지는 장소로서 가파른 산자락이라 낮에도 멧돼지가 내려왔다는 곳이다.

 

지옥은 한참이나 망서리다가 할 수 없이 남 우에게 전화해본다. 징징 울면서 운전하고 전화하는 동생

 

을 데리러 가기엔 혼자선 너무 두려웠다. 고양이가 정말 한 마리일까. 주인을 잃은 짐승들은 무리를 지

 

어 다닌다. 도심이라도 밤엔 정녕 낯선 무법천하가 되는데 이 곳은 살짝 변두리에 가까운 동네였다.

 

통화 연결음이 한참이나 울려도 반응이 없어 꺼버리려는데 그 순간 남 우가 비교적 맹숭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아준다. 초저녁 잠이 많은 종달새 형 남 우는 지금쯤 기상하여 잠시 목욕도 하며 쉬다가 다

 

시 조금 잔 다음 출근하고 있단다. 자영업인 만큼 스케쥴이 남편보다는 융통성이 있을 것이다.

 

자다 출동한 사람같지 않게 점퍼에 모자까지 단정히 착용하고 나온 남 우는 지옥과 같이 차를 달려 나

 

옥을 만나 그녀를 달래가지고 집으로 다 같이 들어왔다. 뜨거운 녹차를 불어 마시는 동안 나옥은 상당

 

히 진정되고 있었다. 직접 가보니 그 곳엔 정말 개도 몇 마리 설렁거리고 있어 남 우와 같이 간 것은 탁

 

월한 판단같았다.

 

"혹시 명이 외삼촌 번호 아세요?"

"그야...무슨 일인데요?"

"명이한테 뭔 일이 생겼나 해서요.."

"내가 물어볼 테니 잠시만 기다려요. 이 친구는 올빼미 형이라 밤엔 잘 안 자요."

 

혼자 베란다로 나가 통화를 하다가 들어온 남 우는 심각한 낯으로 지옥에게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명이가 산에서 없어졌다는데요.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인다고.."

"남편이 정신 없이 나가더라구요. 명이 건이라는 느낌이 오더라구요."

 

조금은 분한 마음으로 말하며 지옥은 나옥을 침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by jemmagalgani | 2010/02/01 17:09 | 트랙백 | 덧글(0)

접 근,눈사람 이야기.72

계단이 바닥의 주름이듯

 

전화나 문자는 우리 생의

 

하늘거리는 프릴이지

 

기나긴 거리가 한결 줄어든다

 

 

비행기로 하늘을 말고

 

지하철이 역마다 입맞추는데

 

몸은 다가오면서 마음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진 않겠지

 

 

창 밖은 점점 어두워지고

 

네모진 집안엔 불 들어온다

 

외풍 한 자락 꼬리 달고 올

 

우리 집 막내 아가씨


~~~~~~~~~~~~

나옥이 만나자고 해서 은이는 가벼운 차림으로 찻길에 나간다.

 

이른바 북 카페로 서가가 즐비한 찻집이다. 조명은 의외로 어둠침침하다.

 

나옥은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크 서클이 진하고 둥글다.

 

"왜 불렀어? 어디 아프기라도 해?"

"내 안색이 그렇게나 안 좋아? 큰 일인데.."

"너같이 어거지로 살면 건강 해치는 게 당연하지."

 

은이는 걱정 반 나무람 반으로 이야기했는데 나옥은 발칵 성을 낸다. 좀 비정상이다.

 

"너만 잘 나고 청결한 척 하지 마. 사회에서 한 자리 얻어 갖는 여자들은 대체로 품행이 안 좋다더라."

"너도 그 해외 토픽 보았니?"

"고급 매춘부였다는 여의사 말이냐? 그 것도 그렇고.."

"너무들 신나 하더라,기가 막혀."

"베푸는 게 있어야 돌봐주는 것도 있다더군."

"요즘은 그런 남자들 드물어졌어. 제 몸 근처에 할렘 하나는 거느려야 직성 풀리는 남자들도 있었다지. 그러나 그 모든 스토리들이 처음엔 그래도 사랑이었겠지."

"사랑 추락시키지 마라.네 말대로 내가 요새 몸이 안 좋다. 왜 그럴까?"

"임신하면 여자들이 대충은 그래. 나랑 같이 잘 아는 산부인과 가볼래?"

"산부인과야 지금도 정기적으로 다니지. 그런 거 말고 아무래도..."

"설마 무꾸리 가자는 말은 아니겠지?"

 

그런데 표정을 보아하니 나옥은 바로 그 짓이 하고 싶은가 보다. 그렇다면 왜 제 엄마나 언니와 같이

 

가지. 은이는 믿는 종교도 든든치 않으면서 점집엔 잘 안 가는 주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데 돈 쓸

 

여유가 없다고나 할까. 아르바이트가 잦은 것도 아니지만 그 거 잘 챙기다가는 학교 공부가 멍이 든다.

 

"가족들 모르게 하려고..신정이라도 정초는 정촌데 이럴 때에 안 가고 뭐 하니."

"내가 낫게 해줄 테니 그 돈 나한테 학비로 기부해라."

"기분도 그렇지 않은데 우리 여흥 삼아 한 번 가보자. 너도 봐,내가 비용은 다 댈 테니.."

 

마침 궂은 비가 주룩주룩 오고 있다. 은이도 그냥 집에 들어가기는 싫어서 나옥이 잡는 대로 택시에 몸

 

을 싣는다. 전단지에 인쇄된 약도를 살펴보며 나옥은 기사에게 방향을 지시한다.

 

정말 기이하게도 점집 주인은 그들보다도 어린 여자애다. 중학생이나 되었을까.

 

곁에서 시중 드는 아줌마는 전신의 생긴 윤곽이 비슷한 게 엄마나 고모,이모같다.

 

"나 먼저 보고 나갈 테니 너는 밖에 있어."

"안 그래도 되요. 이 걸 착용하시면 됩니다."

 

은이에게 건네주는 것들은 검은 안대와 귀마개다. 그 걸 쓰고 은이는 뒤에서 잠자코 앉아 있다.

 

잠시 후 나옥은 그냥 펑펑 울기 시작한다. 울다가 묻고 듣다가 운다.

 

"뭐라고 그러든? 점괘란 다 좋고 나쁘고 하는 거야."

 

일그러진 얼굴이 안쓰러워 이렇게 듣기 좋은 소릴 해보는 은이지만 나옥은 무례하게도 저만 택

 

시를 타고 달려가버린다. 은이는 어처구니가 없어 멍청히 서 있다가 조금 걸어내려와 부근의

 

 서점으로 들어간다. 어차피 보고 싶은 책도 있다. 그런데 입구의 카운터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다.

 

수련과정을 놓쳤다는 여자 선배다. 병원에 있어야 어울릴 사람이 이런 곳에서 일하다니.. 

 

아는 척 하기도 그래서 슬슬 안쪽의 서가로 다가가는데 그 선배가 나직한 음성으로 불러 세운다.

 

"우리 집에서 하는 가게라 틈틈이 봐주는 거야. 손님이 덜 오는 시간이니 우리 차나 마시자."

 

동네 책방이라 그런지 아닌 게 아니라 사람들이 별로 없다. 왠지 인생이 힘겨워지는 하루였다.

 

 

 

 


by jemmagalgani | 2010/01/29 18:20 | 트랙백 | 덧글(0)

뭘 까.눈사람 이야기.71

경비실에 맡긴 택배를

 

세 건이나 들고 들어서는

 

둘째에게 눈이 오냐고 물으니

 

뭔지 모르나 좀 오는데...

 

 

일기 지도에 우산으로 표시된

 

휴가지의 막내는 폭우냐는 질문에

 

그냥 뭔가 내리고 있어

 

그래서 부쩍 궁금증이 생긴다

 

 

너무나 많은 억울한 혼들이

 

그래도 지상의 삶이 좋다고

 

푸득푸득 희끗하니 내려오는 건가

 

지진 못지 않게 우리를 뒤흔드는 미움



~~~~~~~~~~~~~~

러키와 스시는 나란히 창 밖에 서서 원숭이를 안으로 집어넣는다.

 

물론 나옥은 창문과 방문을 철저히 잠그지만 러키는 특수 칼로 유리를 동그랗게 오려내 문고리를 벗겼

 

다. 나옥이 난리 칠 동안 유리를 갈아 끼우면 아무도 알아채지 못 할 것이다. 스시는 아주 고분고분 러

 

키의 지시에 따른다. 입마개를 당한 원숭이는 반쯤 졸면서 안의 바닥으로 떨어진다. 성질이 와락 났을

 

것이다. 게다가 원숭이를 곁에 두고 러키와 스시는 자기들만 저녁내 배달 시킨 청요리와 독주를 마셨

 

다. 영감님도 없는 지금 구태여 나옥의 배 부른 꼴을 견뎌야만 할 이유가 없다. 재물보다도 귀한 것이,

 

그리고 도둑 맞으면 안 될 것이 바로 씨라지 않던가. 더구나 너무나 분명하지도 않은 나옥의 태아를 말

 

이다. 정말이지 이윽고 나옥의 방 안에서는 큰 소란이 일어났고 러키와 스시는 얼른 거실로 돌

 

아가 문을 두드리며 나옥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다가 다른 방법이 없다는 듯 연장들을 가져와

 

 방문 손잡이를 부숴버린다. 전등을 켜자 원숭이가 나옥의 배 위에 올라 앉아 있다. 유인원인

 

동물답게 자칫 왜소한 사람으로도 보일 듯 하다. 스시는 들고 온 카메라로 얼른 사진을 찍는다.

 

"살려줘,이 게 왜 나한테..."

"사랑스러운 애완용인데 왜 그러는 거야? 야단 치면 위험할 지도 몰라."

"당신들 지금 뭐하자는 거야?"

"명색이 시어머니에 시아주버니한테 이 무슨 버르장머리야."

 

그런데 갑자기 마당에서 전 진의 기척이 들린다. 밤이든 낮이든 아무 때나 들어오는 전 진이니

 

만큼 이 야심한 새벽에 못 돌아올 인간도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도 당황한 러키는 급히 나옥의

 

문갑을 뒤져 통장과 현찰,보석 등을 훔쳐 거실로 나간다. 스시는 원숭이를 안아 들고 자기 방으

 

로 돌아가버린다. 바지 주머니의 열쇠로 문을 열고 거실에 들어선 전 진은 드물게 기분이 퍽 좋

 

아 보인다.

 

"형님,오늘은 늦잠이시네요. 무얼 하시느라고?"

"너무 소란스러워서 잘 수가 없더라. 나옥이 좀 봐줘라."

"왜요? 혹시 신종 플루라도?"

"그런 거에 걸릴 여성은 아니지. 아무튼 네가 다 알아서 해."

"형님,오늘은 아주 대박이에요. 제법 주가가 올랐다구요."

"너도 참,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순간 나옥이 다시 새된 비명을 질러서 러키는 급히 자기 방으로 숨고 전 진이 화다닥 나옥에게

 

 다가온다. 얼핏 본 실내 정경은 흡사 강도가 들었다 나간 것같다.

 

"저 사람들이 나를 죽이려고 원숭이를.."

"무슨 원숭이를 찾는 거야? 좀도둑이 들어왔던 것같은데.."

"오빠가 뭘 안다고 그래요? 분명히 괴물 원숭인데.."

"정신 차려. 그리고 이젠 정말 본가에 가 있으라고..신변이 불안하면 여자는 그 수가 상수니까..아버지한테는 내가 다 말해놓을 게."

"아버지는...이 집에 뭔가 확신을 갖고 있는데..."

"확신이라고? 우리 집 터에서 금이라도 캐내실 거란 말이야?"

 

말도 안 된다는 듯 내뱉던 전 진은 나옥의 긁힌 상처에 그제서야 약을 발라준다.

 

새로 막지 못 한 유리창에서 겨울 밤바람이 험하게 불어온다.

 

"어디서 오는 길이에요?"

"아는 사람이 오피스텔에 새로 이사해가서..."

"은이는 만나지 말아요. 그 아인 러키를 좋아해요."

"나옥이 상관할 일은 아니고...어차피 이론상으로는 내 마누라라니까.."

 

전 진은 슬그머니 나옥의 침대로 들어간다. 흐트러진 잠옷 사이로 보이는 속살이 시선을 당기

 

는데다 모처럼 제대로 흥분한 나옥의 얼굴이 제법 고와보이기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옥은

 

 한사코 전 진을 뿌리친다. 안 그래도 흔들린 태아에 심각한 지장이 초래될 것같아서이다. 저녁

 

에서 새벽에 이르는 동안 은이와 마드 서,나옥의 세 여자에게 모조리 완패를 당한 전 진은 투덜

 

거리면서 이층으로 올라간다. 방이 추우면 알아서 다른 곳으로 가서 자겠지. 남자의 말을 안 듣

 

는 여자는 고생을 해봐야 한다. 나옥은 결국 자기 방에서 나와 거실의 열풍기를 소퍼 곁에 갖다

 

놓고 길게 눕는다.

 

 

 

 


 

by jemmagalgani | 2010/01/28 16:02 | 트랙백 | 덧글(0)

저 녁,눈사람 이야기.70

비둘기처럼 매처럼

 

문자들이 날아든다

 

저녁 먹을 시간이면

 

그렇게 하기로 부탁해둔다

 

 

대학로서 먹고 온다네

 

부산에서 회식이라네

 

잘 먹고 호텔 들었다네

 

조그만 휴대폰에 전국이 담겨든다

 

 

엄마는 7남매를 무슨 수로

 

다 챙기며 살았을까

 

그러다가 무리해서 먼저

 

멀리 가버리신 것일까



~~~~~~~~~~~~`

나옥은 빈 집에 편히 드러누워 부친이 놓고 간 사진 패널을 올려다 본다.

 

작고 색 바랜 것이지만 사진의 인물은 두 눈이 시원한 여대생이다.

 

부친을 많이 닮았으니 필시 친가의 고모나 언니들 중 하나이리라.

 

산 사람인가,이미 죽어버린 여자인가. 궁금하지만 부친은 그 이상 말해주지 않았다.

 

그냥 이 사진을 거실 벽에 붙여두란다. 그렇게 한다면 조만간 뭔 일이 발생할 것이라니..

 

그러고보면 아버지는 왜 굳이 나옥을 이 집안에 밀어 넣어둔 것일까.

 

언니인 지옥보다는 나옥이 대담하고 기지가 많다는 걸 부모는 알고 있었다.

 

"넌 어려서부터 항상 남다른 생각을 잘 해냈어.영리해서 그런 거야."

 

학교 성적은 언니가 조금 나았지만 실생활에서의 도움은 나옥이 더 주었단다.

 

"그 날 밤 우린 다 죽는 줄만 알았는데 뜬금 없이 네가 그 강도랑 이러쿵저러쿵 말이 통하더니 그냥 돌아가지 뭐냐. 어리지만 네가 눈치가 비상하고 남의 마음을 말갛게 들여다 본다며 잘 기르라고 하더라. 엄마 태몽이 맞는 게야. 엄마가 널 가졌을 적에 돌아가신 장모를 보았다더라."

 

그래서 나옥은 공부 잘 못 하는 딸내미 치고는 대접을 융숭히 받으며 컸다.

 

자기도 모르게 사진을 품에 안고 잠이 든 나옥은 아주 이상한 꿈을 꾸었다.

 

사진 속의 여인이 분명한 한 젊은 여자가 나옥의 손을 잡아 당겨 지하층으로 가고 있었다.

 

전에 영감님이 병실로 사용한 너른 방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우두커니 서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러더니 문득 길다란 흰 비단수건을 소매 속에서 꺼내 나옥의 배를 감아주었다. 태아를 소중히 간직

 

하라는 말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나옥은 요즘 배가 아프거나 가슴이 갑자기 답답해진다.

 

이 아이는 누가 뭐래도 전 진의 핏줄이야. 그 날 저녁 전 진도 내 몸에 손을 댄 것같았거든.

 

현관문을 벼락치듯 닫는 시끄러운 소리에 화들짝 잠을 깨보니 스시가 들어와 있다.


전에 알던 유력자를 만나러 간다고 잔뜩 멋부리고 나가더니 결과가 신통치 않은가 보았다.

 

"척추라도 나갔니,만날 드러누워 살게."

"임신 안 해본 사람은 말할 자격 없네요."

"시건방지게..창피한 줄도 모르고...면사포도 못 쓴 것이 입만 살았어."

"나가서 구박 받은 설움을 왜 나한테 퍼부어요?"

 

신경질이 나서 발딱 일어서던 나옥은 그만 사진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만다. 그러자 스시의 날카로운

 

 시선이 찌를 듯 사진에 와 박힌다. 나옥은 급급히 사진을 치마로 싸안는다.

 

"흥,어디서 귀신같은 여자 사진을...당장 내다버려."

"웃기지 말아요. 족발이나 얻어 먹던 주제에.."

"무슨 족발? 나는 채식주의자라고.."

"귀지 좀 파내요. 여기서 족발이란 왜소한 사람들을 일컫는 거죠."

 

그런데 갑자기 러키가 원숭이를 한 마리 안고 들어오기에 나옥은 재빨리 자기 방으로 후퇴해버렸다.

 

나옥은 왠지 애완용 동물들에게 취약한 것이다. 스시와 정반대의 속성이다.

 

"마미,내가 천하에서 제일 귀여운 원숭이 얻어 왔지."

"어머나,정말 잘 했어. 이 걸로 그 버르장머리를 징벌하는 거야."

 

정말 모처럼만에 러키와 스시는 전실 아들과 서모의 전같은 관계를 회복하고 희희낙락 좋아한다.

 

흥,우리한테 약점은 용코로 잡힌 여자가...한 번만 더 이러면 당장 러키와 전 진에게 틀어줄 걸,그 야단

 

스러운 도색 필름을 말이야. 기가 살아 소리 치듯 말하는 스시에게 나옥은 방 안에서 눈을 흘긴다.

 


 


by jemmagalgani | 2010/01/27 18:40 | 트랙백 | 덧글(0)

역 마,눈사람 이야기.69

과거의 역마살이 요즘

 

첨단 주유 천하 복으로

 

화려한 조명을 받고 있지만

 

그래도 정말 이틀 연거퍼...

 

 

인천 터미널에서 집으로

 

내일이면 부산에서 동해를 거슬러

 

겨울 바다의 낭만 아닌

 

치열한 작업을 해야만 한다

 

 

중저가의 인조 가죽 소퍼를

 

하릴 없이 누르며 사는

 

나하고 반반 나누면 어쩔지

 

세상사는 뜻대로 되기 힘들다



~~~~~~~~~~

한지숙과 김옥정,모녀의 사이에서 몽돌은 허겁지겁 과자를 먹는다.

 

매일 저녁에 들른다는 남 우가 놓고 간 슈우크림과 센베이과자다.

 

제법 파래 내음이 향긋한 센베이를 하나 집어 들고 몽돌은 모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본다.

 

어린애는 천진하다지만,그리고 몽돌이란 아이 자체가 도시 애들과는 다르게 맑고 순진한 천성인 것이

 

사실이라도 며칠이나 무겁고 흐릿한 집안에 갇혀 살다시피 하고 있다보니 한껏 가라앉아버렸다.

 

인화성 물질이 가득 피어오른 것같은 실내는 당장이라도 누가 성냥만 켜들면 확하고 불이 붙을 것같

 

다. 하지만 두 여자는 거의 비슷하게 서로를 모르는 체 하고 있다.

 

"엄마,배 고파.."

 

섬에서도 못 먹인 건 아니지만 서울하고도 한복판의 모든 맛이 입에 단 몽돌은 수시로 먹을 걸 졸라댄

 

다. 그 덕에 그나마 두 여자의 하루가 조금은 만만하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겠다. 옥정이 먼저 일어나 냉

 

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온다. 이 집의 주인이 옥정인 것만큼은 사실이다. 그리고 지숙은 거의 반

 

편인 것처럼 열 손가락을 제 자리에 묶어두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저리도 닮았을까. 이 사람이 정녕 지숙일까. 그래도 남 우는 아직까지 남 보듯 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모레는 옥정의 몇몇 친구들이 계모임 삼아 놀러오는 날이다. 그 아이들이 지숙을

 

 알아보면 어쩌지. 그 날 그처럼 평생 처음인 언쟁을 대판 하고나서 갑자기 실종돼버린 지숙,그 이후로

 

는 다시 만날까 두려워진 딸이다. 남들은 잘 얻은 사위라지만 남 우가 들어온 이후부터 모녀의 사이엔

 

 늘 모래알이 버석거렸다. 혼자 몸으로 힘들게 기른 딸보다 사위가 더 좋아지다니...

 

물론 남 우가 고의로 만들어낸 상황은 아니다. 너무나 임의롭게 지낸 것이 문제였을까.

 

아마도 두 여인이 지나치게 닮아서일 것이다. 분간이 어렵다고 가끔 남 우는 불평 아닌 불평을 했다.

"병원에서 전문적인 치료를 받지. 아이는 내가 맡아서 키울게."

"절대로 병은 아니에요. 왜 나를 자꾸 불행하게 만드는 거에요?"

"행,불행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할 탓이야. 나는 정말 피눈물 흘리며 살아왔다고.."

"그 피눈물을 나한테 대 물릴 거에요?"

"넌 달라, 조금만 참으면 몽돌이 클 테니까..몽돌은 아들이잖니."

"이 번엔 엄마가..멀리 다녀오면 어때요?"

"내 무릎 관절 나간 거 잘 알면서 그래?"

 

몽돌이 어기적거리며 일어나더니 제 발로 욕실에 가서 오줌을 눈다. 욕조의 넘치는 물을 보더니 탄성

 

을 지르며 뛰어든다. 바닷가에서 온종일 놀던 아이였다. 문득 현관 벨이 울리더니 지옥이 나타난다.

 

문을 열어주는 지숙에게 시금치와 감자를 가득 안겨주고는 값을 달라고 손바닥을 내민다. 알뜰시장에

 

서 요즘 귀한 채소를 많이 사다가 너무 많아 나눠온 것이라고 한다. 그 것보다도 모녀가 집 앞 마트에

 

도 잘 가지 않는 걸 알기때문이다. 남 우의 부탁이라도 받았을까. 친정에 간다면서 부리나케 문을 닫는

 

 지옥의 뒤로 차가운 바깥 공기가 듬뿍 흘러든다. 따스한 남녁 섬에서 자란 몽돌이 금새 욕실에서 재채

 

기를 터트린다. 역시 옥정이 얼른 들어가서 발가벗은 아이를 큰 타월에 감아 내온다.

 

몽돌을 침대에 넣은 후 모녀는 묵묵히 다과를 사이에 두고 마주본다.

 

"남 우가 치료 받는 거 모르지?"

"갑자기 치료는요?"

"마음을 상담하는 거 말이야. 우리땜에 돌아버리겠다고 한단다."

"나는 이미 피해자가 되었어요."

"넌 왜 나를 이리도 안 믿니? 이러면서 우리가 무슨 가족이니?"

"나더러 도로 나가란 말인가요?"

"우리 셋,아니 넷이 도란도란 같이 살면 얼마나 좋겠어. 하지만 너는 늘 나에게 고약한 눈빛을 보내고..그러니 나도 정녕 생병이 날 지경인데..."

"남 우는 엄마 편이에요. 누가 보아도 그렇다구요."

"나는 결코 네 시엄마가 아니야. 정신 차려."

 

옥정은 부르르 떨다가 문갑 서랍을 열고 알약을 듬뿍 꺼내 먹는다. 지숙은 당황해 한다.

 

"집으로 간병인을 불렀어. 낼이라도 들이 닥칠 게야. 우리 피차 남 앞에선 조심하자."

"왜 나한테 상의도 안 하고서? 어떤 여자야? 또는 남자야?"

"넌 늘 나만 믿어야 해. 남들의 모략은 듣지 말아. 그들은 내 재산이 탐나서 그래."

"어떤 사람이냐고 묻잖우."

"30대 중반쯤의 처녀래. 인터넷에서 보고 부른 거야."

"밥이랑 청소도 맡겨버릴 거야."

 

정말 오래간만에 지숙은 가볍게 웃는다. 엄마 혼자 기른다며 딸을 지나치게 오냐오냐 받아준 게

 

 잘못이었다고 옥정은 가슴을 친다. 사춘기 시절에 약간의 우울증을 앓고 지나간 지숙,그 당시에 병의

 

근원을 뿌리뽑아야만 했나. 옥정은 항시 남 우에게 미안했고 그래서 저자세였으며 거의 대부분 휘둘리

 

면서 살아왔다. 남 우에겐 그만한 능력과 매력이 있었다.



by jemmagalgani | 2010/01/26 18:23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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