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20일
감 귤,눈사람 이야기.24
새로 들인 벽장식 대형 냉장고 과일통에
둘째가 제주에서 사온 꼬마 감귤이랑
큰애기 젖가슴처럼 봉곳한 대봉감이랑
목요일 오전에만 20프로 세일의 멜런 한 수를 넣었어요
천연색 산수화 여백에
황진이의 시조가 세로로 쓰여져 있던
자랄 적 벽장의 네 짝 문들
그 앞 보료에 놋화로 안고 좌정하신 할머니..
콩엿이랑 검은 깨 인절미랑
곶감이랑 아주 두툼한 책들이랑
벽장에서 딩굴다가 한 입만 맛보고
또 맛보다가 인쥐 되던 추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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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의 불편한 걸음을 부축하며 뒤에서 나타나는 건 의외로 나옥이었다.
눈길에 한바탕 미끄러졌었던지 두 여자의 옷에는 눈이 군데군데 묻어 있다.
"정말 오긴 오네."
"미안해요,전 진씨."
"거짓말 한 건 아니었어."
"우체국을 가려다가 그만 이 언니를 만나서.."
"혼자서 일어나긴 힘들 것같아서 조금 거든 거야. 그러느라 시간은 걸렸지만.."
"우체국 거의 다 가서...그 공터에서요."
네 사람은 한 동안 정신 없이 서로의 말을 교차시킨다.
눈을 털고 수건으로 머리와 이마를 닦은 후에야 나옥과 이오는 안으로 올라선다.
진분홍 코트 위에 새하얀 모피 목도리를 길게 두른 나옥의 오늘 의상 컨셉은 무척 순수해보인다.
그런가 하면 이오는 만약의 낙상에 대한 방비책인지 누비질 된 반코트와 바지를 입고 있다.
은이는 유자차를 한 잔 더 만들어서 탁자에 다과를 올린다.
"무슨 중대사로 이런 날에 외출을..?"
나옥과 전 진이 잠시 시선을 나누는 것이 왠지 기분에 거슬려 은이는 이오만을 바라본다.
"악보를 갖고 싶다는 인터넷 이웃한테 부쳐주느라.."
"직접 와서 받아가라지."
"남해안 섬에 사는 남자인데 나보다 더 장애가 높아요."
은이는 약간 감동해서 탄성을 올린다. 조금이라도 일찍 부쳐주려고 이오가 무리한 나들이를 감행했을 것이다.
재활의학만 선택하려는 동기 남학생이 기억 난다. 장애란 정말 얼마나 불편한가.
"너는 공부만 해.우리끼리 놀고 있을 테니.."
나옥이 은이의 눈치를 보다가 밀어붙이듯 말해버린다. 전 진은 이오를 일으켜보고 있다.
둔부에 멍이라도 들었을까 봐 배려하는 눈치다. 하기야 이오의 가냘픈 몸은 겉보기에 아슬아슬하다.
"좀 쉬어요. 우리도 그냥 같이 음악이나 듣고 티브이나 보고.."
"마침 이 분이 여기로 오는 길이라 정말 다행이었어요."
"사람이 살다가 아주 죽으란 법은 없는 셈이죠. 앞으로 우리 친하게 지내요."
"아버지한테서 댁의 이야긴 잘 듣고 있어요. 아버지가 전에는 아버님하고 동네 등산 모임 회원이었대요."
"그렇죠. 아주 너무나 액티브한 분이었으니까요."
전 진은 한숨을 푹 내쉰다. 마치 죽은 것처럼 쇠약해진 현재의 부친이 눈 앞에 떠오른다.
"이런 날은 눈사람도 만들고 눈싸움도 해야 하는데.."
"강아지 천성이신가 보네. 하기야 강아지도 원래는 발바닥이 차가운 게 싫어 그렇게 깡충거린다지만.."
"눈이 오면 난 없던 기운도 나요."
"그러면 우리 둘만 마당에서 놀아볼래요?"
이오가 소퍼에 비스듬히 눕는 걸 보고나서 전 진은 나옥을 데리고 밖으로 나간다.
생각보다 긴 시간 동안 두 남녀는 즐거운 소리를 지르며 눈장난을 친다. 저러다 진짜로 정 들겠네.
"은이야,저 사람들 언제부터 저렇게 연인이야? 러브 스토리 영화의 한 장면같다."
"전선배는 눈 싫어해. 그냥 대접삼아 저러는 거지."
"어머나,제법 사람같은 눈사람이다,저 거.."
누운 이오가 환성을 지르기에 내다보니 유리창 바로 밖에 키 큰 눈사람이 만들어지는 중이다.
"웃긴다,어린애도 하나 만들어 붙이네."
"아무튼 나옥은 오버라니까..감기들이나 걸려보라지."
"어머,그러지 마. 저러다 결혼할 지도 모르는데.."
이오가 사심 없이 즐거워보여 은이도 그냥 좋아해주기로 작심한다.
이오가 두 팔을 들 적마다 아직도 다 여물지 않은 팔목의 상처가 보이기때문이다.
이러다가 정녕 아가타 크리스티의 쥐덫에서처럼 눈으로 둘러쳐진 밀실이 생겨나면 어떡하나.
아 참 집에 스키가 있지. 스노 보드도 있으니 대충 안심이네. 그러나 갈수록 전 진이 밉다.
나옥같은 여자애 마음에도 없으면서 오래 상대해주는 수컷으로서의 전 진 말이다.
간절히 기다려지는 부모는 오늘따라 통 돌아올 기척이 안 보인다. 나옥이 이오같았으면 안심 될 텐데...
# by | 2009/11/20 16:52 | 트랙백 | 덧글(0)



